[수필] 지하철 출구 - 농축산기계신문

오래전 처음 서울생활을 시작할 때의 일이다.

2월의 끝자락 아직 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코끝에 시리던 날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인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학입학 후 처음으로 나홀로 등교를 하는 날이었다. 어렸을 적, 아니 아주 꼬맹이였던 시절 어머니 손을 붙잡고 몇 번인가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봤던 기억은 있지만 그건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풋내기에게는 기억조차 희미한 아련한 기억이었다.

지방에서 막 상경한 나는 서울역에서 여차저차 어렵게 지하철을 타고 4호선 전철역인 혜화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혜화역에 도착한 나는 막내누나가 쥐어준 서울 교통카드를 꼭 손에 쥐고 개찰구를 나섰다. 입학시험을 볼 때 일행과 함께 와본 적은 있었지만 이제 막 서울생활을 혼자 시작한 나에게는 모든 게 낯설고 조심해야 할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서울역을 처음 나오자마자 정신없이 담배를 빌려대는 노숙자들, 그들 사이로 펼쳐지는 대로와 그 양옆으로 우뚝 서있는 빌딩숲의 낯선 풍경, 그리고 고향 친구들과 부모님이 그렇게 강조했던 눈뜨고 코 베어 간다던 ‘서울 소매치기’도 경계해야 했다.

아무튼 그날 나는 처음 비행기를 타던 날처럼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설렘을 감추고 매일 지하철을 타는 서울사람들처럼 능숙한 척을 해야만 했었기에 신경이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혜화역에 도착도 하기 전에 이미 진이 빠져버렸다. 혜화역에 내릴 때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안도의 숨을 쉬는 것도 잠시, 개찰구를 빠져나오며 갑작스런 난관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출구가 대체 몇 개란 말인가. 사실 고백하자면, 당시에 난 지하철 출구는 하나인줄 알았다. 모든 것에는 입구와 출구가 있듯이 지하철도 그런 줄 알았다. 출구에 번호가 달려있다는 것은 당시의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시스템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대전에서 좀 떨어진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지하철 타는 것은 별것 아닌 미션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학교에 간다’정도였다. 하지만 3시간이 지난 후 그 미션은 풀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미션을 완수하는 모든 스파이 영화의 도입부가 그렇듯이 힘들게 얻었던 정보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꼬여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말할 때면 혹자는 이렇게들 말한다. “어느 방면이라고 쓰여 있지 않나?”, “중간에 출구안내 지도 같은 거 있지 않나?”,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물어보지 그랬어?”, “뭐야? 너희 고향에는 지하철도 없어?”등등.

우선 내 고향에는 지하철이 없다. 또한 갑자기 당황한 상황에서 다른 방법들을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게 낯선 상황에서 어느 방면이라고 쓰여 있는 지도가 눈에 들어올 리 없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기에는 이미 서울사람인척 나름 능숙한 연기를 펼쳐야 했던 이상한 의무감이 있었기에 도저히 내 자신의 허세가 백기를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능을 본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그것도 객관식이면 그 기준은 너무도 확실했다. ‘모르면 3번!’, 그래서 3번 출구로 나갔다.

원래 학교로 가는 길은 4번 출구다. 그 후로 혜화역을 다닐 때는 누구를 만나던, 학교에 등교하는 날이던, 항상 4번 출구로만 다녔다. 사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3번 출구로 나갔던 적도, 들어갔던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날 처음 나는 3번 출구로 나갔고,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학교를 찾기 위해 한 시간을 헤맸고, 한 시간 뒤에 다시 3번 출구로 돌아와 결국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님이 “걸어가면 금방인데 왜 차를 타냐?”라고 물어봤지만 이미 상처받은 허세는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놓지 않았다.

“아저씨, 급한 일이 있어요. 빨리 가주세요.”

2015년 다시 그 학교에 볼일이 있어 가기로 했다. 또 다른 신입생으로, 30대 중반의 대학원생으로. 이번에는 정말 능숙하게 서울사람처럼 혜화역 4번 출구에서 내려서 10분정도 도보로 걸어서 헤매지 않고 들어가게 됐다.

꽤 오래 걸렸다. 제대로 된 입구와 출구를 찾는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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