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유머가 풍부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독특한 재주가 있었다. 30대 중반이 넘어 보이는 나이의 흔적이 얼굴에 나타나긴 했지만, 깡마른 체격에 찢어진 청바지와 줄무늬 흰 남방을 입은 모습이 무척이나 어울렸다.

늦은 시간이면 곧잘 모짜르트의 교향곡 40번 G단조를 즐겨들으며, 생물학을 전공했다는 이야기에 어울리게 자연과학에 대한 상식이 풍부했다. 그녀는 치즈를 재료로 한 안주를 잘 만들었 다. 늦은 시각 보통은 안주 없이 술 한잔하러 들리곤 하던 곳이었지만, 그녀는 특별히 치즈로 만들어진 안주를 서비스하곤 했다.

조그만 크래커에 필라델피아 치즈크림을 듬뿍 발라 과일조각을 올린 안주는 그만이었다. 덩어리 치즈를 얇게 저며 절임올리브에 꼬치를 만들어 나오는 안주도 괜찮았다. 거래처 손님이나 직장 상사와 그곳에 자주가는 이유는 이미 설명했듯이 조용하고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되는 부담이 적다는 것이다.

직장인이 자기 돈을 내고 술을 마실 만큼 형편이 좋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업무의 연장이라고는 하지만 회사 돈을 쓰면서도 맘 편히 쓰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한 달 에 한두 번이지만 늘 술값은 부담스럽다. 또 한 가지 그 카페가 좋은 점은 아담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탓이다. 여의도 한가운데 어떻게 이런 카페가 운영될까 싶을 정도로 늘 손님이 없었다. 물론 들리는 시간대가 늘 늦은 시간이기 때문에 평소 손님수를 알 수는 없지만, 그런저런 이유로 가끔 그곳을 찾을 때마다 유독 손님은 우리 일행뿐이 없기에 그녀는 우리를 가족처럼 맞이했고 자연스럽게 우리와 술자리에 어울렸다.

보통은 맥주 몇 병으로 한두 시간 쉬고 나올 때가 많았지만, 간간이 국산양주라도 몇 병시키는 날에는 문 닫아놓고 새벽까지 이야기 꽃을 피웠다. 우리는 양주를 마실 때 즐겨마시는 방법이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영화 '타이타닉'을 응용한 술자리 문화였다.

맥주잔에 7부로 맥주를 채우고 그 위에 빈 스트레이트 잔을 띄운다. 말 그대로 배 진수식이다. 그리고는 돌아가며 당시 국산양주인 임페리얼이나 윈저를 그 스트레이트잔에 조금씩 붓는다. 물론 스트레이트잔이 차올라 가라앉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일 붓다가 가라앉으면 그 사람이 그 잔을 모두 마셔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결국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모두 취하게 된다. 매우 비정상적인 술자리 문화지만, 어쩌겠는가? 다들 그리하니 나도 따라하는 수밖에...

결정적으로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계기는 이렇다. 평소 주량이 약한 나로서는 늘 술 자리에서 조심하는 편이다. 눈치껏 사양하거나 물을 타 마시거나 분위기 흐리지 않는 범위에서 조절을 한다. 그런 내 주량을 알기 때문에 그녀도 내게 술을 자주 권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날은 운없이 상무이사 옆자리에 앉는 바람에 된통 걸리고 말았다.

어찌나 술을 잘 따르는지 내 차례가 되어 술 한 방울만 따라도 잔이 가라앉고 마니... 그렇게 연거푸 일곱 여덟 잔을 마시고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돈 만원 벌금을 내면 그 잔을 마시지 않아도 좋지만 어디 한두 잔이래야 벌금을 내지... 얼굴이 여기저기 빨갛게 달아오르고 숨조차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내 주량을 아는 그녀가 어떻게 날 도울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김 부장님 술은 자기가 마시겠다고 선언하고 나온 것! 모두들 야유를 보내며 환호했지만... 난 반가운 마음보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날 그녀는 대취하고 말았다. 다행히 여종업원이 한사람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나올 수는 있었지만... 어쨌든 난 그녀에게 신세를 톡톡히 지게 된 셈이다.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그녀와 나는 마음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신뢰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카페를 들리게 되면 기분이 좋아져서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무더운 여름이 가고 선선한 가을이 깊어갈 무렵. 회사 내의 임원 승진발령이 있던 날, 회식과 2차 3차로 이어지더니... 결국 남는 몇 사람이 그 카페를 찾게 되었다. 상무이사는 호기 있게 양주를 한 병 시켰지만 이미 맛이 완전히 간 상태였고, 모두들 술들이 과해 더 한다는 것은 무리한 상태에 있었다.

다행히 난 전 자리에서 술을 조금밖에 마시지 않아 돌리는 잔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었다. 예의 '타이타닉'은 변함없이 진수가 되고... 여기저기 벌금을 내는 사람들이 늘어가더니 하나둘 자리를 뜨고,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모 부장 때문에 결국 내가 남게 되었 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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