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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춘례 할머니의 긴 하루

76세인 이춘례 할머니는 오늘 바쁘다.
오늘은 2년 전 수술한 무릎 인공관절 때문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가는 날이다. 요즘 할머니는 치매로 고생하던 할아버지가 종합병원에 잠시 입원해 있다가 요양병원으로 옮긴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어 마음이 편치 않다. 치매인 할아버지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마다 자꾸 집에 가고 싶다고 보채는 모습이 아른거려 속 깊은 할머니 마음이 무거운 까닭이다.

할머니는 ‘내가 다리만 덜 불편했어도 할아버지를 좀 더 오래 집에 모실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할아버지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곤 한다. 자식들에게는 “내가 도저히 더는 할아버지 수발을 못하겠다. 이러다 내가 먼저 죽겠다”라고 엄포를 놓으며 할아버지의 입원을 결정했지만, 할아버지 때문에 온 가족이 겪고 있는 걱정을 헤아려야 하는 할머니 입장에서는 그 마음이 다 진심은 아닐 것이다.

할머니는 지금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슬하에 5남매를 두고 있지만 젊은 시절엔 억척스럽게 식당을 운영해 돈도 어느 정도 모았고,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일구고 다섯 자식을 다 훌륭하게 공부시킨 집안의 기둥이었고 여장부였다. 자식들도 이런 어머니를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어머니의 건강과 편안한 노후를 걱정하는 지극한 마음들이다. 다들 가까이 살면서 자주 함께 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듣기에도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무릎 수술 후 후유증인지 한쪽 다리가 약간 밖으로 휘어지면서 걸을 때마다 조금씩 저는 모습이 불안해보여 며느리가 근처 학교로 방가 후 수업을 나가는 길에 병원까지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병원에 도착한 며느리가 부축하기 위해 운전석에서 내리는 사이 할머니는 먼저 뒷문을 열고 내려 한두 걸음 걷다가 그만 도로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급히 응급실로 옮겨진 할머니의 상태는 고관절 골절이 의심된다는 진단이었다.

나는 이 소식을 이날 점심약속이 되어있는 할머니의 둘째 딸에게서 들었다. 내 직장동료이기도 한 둘째 딸은 나와의 약속장소로 오던 길에 이 소식을 접했고, 함께 소식을 들은 큰 언니가 먼저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어 점심만 먹고 얼른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난 둘째 딸과 서둘러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몇 해 전 대학 은사님도 백화점에서 아이가 흘린 바나나 껍질을 밟아 미끄러지며 고관절을 다쳐 수술에서 재활까지 거의 일 년 넘게 고생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이때까지만 해도 할머니의 상태가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저녁 둘째 딸과의 안부전화에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전해 듣게 됐다. 처음 응급처치를 받은 병원의 수술 스케줄이 여의치 않아 엠블런스를 통해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응급실 병상이 만원이라 2시간 넘게 대기하다 겨우 진료를 받고 밤늦게 병실로 옮겼다는 이야기다.

다음날 정밀진단을 통해 할머니의 골절상태가 심각해 6개월 안에 수술하지 않으면 위독할 수도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설상가상 할머니가 혈압약을 복용중이어서 수술 중 과다출혈의 위험이 있고, 골다공증이 심해 뼈에 철심을 박기도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극심한 통증보다도 앞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해 대소변을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평소 자존심 강하고 깔끔한 성품의 할머니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통과 수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누군가는 할머니 곁을 종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5남매 모두가 직장을 다니고 있어 병간호에 매달릴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또한 요양병원에 있는 할아버지도 수시로 들여다봐야 하는데 할머니만큼 챙겨줄 사람이 만무하다는 점이다. 결국 가족회의를 통해 모두가 짐을 조금씩 나눠 갖기로 하고 할머니와 가장 가까운 둘째 딸이 간병인의 조력을 받아 그 짐의 상당부분을 맡기로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할머니는 벌써부터 하루 9만원씩 들어가는 간병비를 걱정하며 “내가 무슨 잘못을 많이 해 말년에 이런 벌을 받느냐”며 눈물짓고 있다는 것이다.
긴 통화는 밤 12시까지 계속됐다. 전화통화 후 난 갑자기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나도 할머니처럼 나이 들어 이런 일이 생기면 어쩌지? 누가 날 돌봐줄까. 5남매를 둔 할머니 사정도 이럴 진데 달랑 아들 하나인 나는 어쩌겠는가. 100시대가 결코 반갑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 가방 들고 입원하러 가는 내 모습이 그려져 마음이 자꾸 가라앉았다.

며칠 후 할머니는 수술을 받았다. 우려한대로 할머니의 골다공증이 심해 철심은 박지 못하고 시멘트로 고정하는 보조처치로 수술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사무실 한 편에서 목소리를 낮춰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직장동료는 할머니가 듣기라도 할세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누워만 계시다가 아주 못 일어나실 수도 있다는 거야. 큰일이야, 큰일...”

안양 신현호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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